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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생일, 1999

생각 / 2025. 5. 30. 03:17

1996년에 데뷔한 H.O.T.는 대중문화 역사상 기념할만한 성과를 거둔 그룹이며 그 인기는 지금 20대들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현재 우리나라 모든 아이돌 팬덤의 인기를 합친 정도가 H.O.T. 인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교 중학년이고 아이돌을 잘 모르는 나이였인 나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공책이 300원이었는데 H.O.T.의 사진이 겉표지로 있던 고급스러운 공책은 500원이었고(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했는데 문구점 아주머니가 못만지게 했던..) 동네 뒷산의 정자에는 H.O.T. 팬들과 젝스키스의 팬들이 서로를 비방하며 살벌한 문구를 적어놓은 흔적들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예전 아이돌의 인기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타이틀 곡도 아닌 한 수록곡에 대한 내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80년대 후반생은 H.O.T. 세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린 감이 있었다. 그래도 워낙 전국민적인 인기를 누리던 그룹이라 80년생부터 90년생 팬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10살은 더 많은 성인들이었을뿐더러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어린이들이 보는 잡지에서 H.O.T. 앨범의 트랙리스트를 보았고, '12번째 생일' 이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다.

'12번째 생일이라고? 다 큰 성인들이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12살이란 무엇인가. 12살에 내가 겪었던 왕따와 가정에서의 일을 그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학교와 집 안에서도 괴로움을 겪고 어디에도 안식처가 없는, 도망칠곳 없는 나의 심정을 알까. 옥상도 생각하고 아파트도 생각했지만 집이 2층이라 한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높이라서 평생을 불구로 살수밖에 없나 라고 생각한 내 심정을 알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노래 가사가 궁금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만두었다. 만약에 그 노래가 나의 심정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나는 큰 실망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는 성인이 되었고 어디선가 우연히 H.O.T.의 '12번째 생일' 이라는 제목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사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열두번째 내 생일은 일요일
하지만 난 너무 슬펐었지
바로 전날 엄청나게 혼나서
열두번째 내 생일을 우리 엄마 아빠가 아예 없애버렸어."

"마치 너의 생일이 꼭 내 생일같아
오늘 너의 곁에서 또 다시 태어나고 싶어
그래 오늘 너의 생일날 열두번째 초를 꽂으며
잠시 잃어버린 추억 을 되찾고 싶은 거야."

10 몇년만에 노래 가사를 알게 되었다. 역시나, 어렸을 때가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가사를 찾아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보편적인 대중가요에서는 한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담기 어렵다. 노래 자체가 마냥 밝은 가사와 톤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는 적어도 12살 아이에게 기대되는 아이다운 모습과 밝고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가사를 찾아보니 살짝 허무한 감은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노래 작사가들과 노래를 부른 가수들의 잘못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SM 소속사 그룹인 NCT 마크의 솔로곡을 듣게 되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듣게 되었다. "1999년 다시 느껴 난~"
1999년에 태어난 마크는 마치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며 무대 위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마크에게는 1999년이 자신이 출생한 해이며 자신의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의지하고 기념할만한 랜드마크인 년도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죽으려고 했었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난 해이며,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바이브를 느끼는 해가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해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누군가는 천국에 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지옥에 살 수도 있다. 지금 2025년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원천을 느끼는 시간임과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고 생이 끝날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접점이 없으며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에 그런 점에서는 평등한 면도 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 전에. 나는 H.O.T.의 '12번째 생일' 노래의 가사를 다시 살펴보았다. 20대에 이 가사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지금 30대가 되었을 때 보았던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20대에 이 가사를 보았을 때에는 이 노래가 어른들이 생각하는 12살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노래하는 것으로만 생각되었지만 마지막 가사를 보니 좀 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기쁜 날 기분 좋은 날 사랑하는 너의 생일
오늘 난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기쁜 날 기분 좋은 날 사랑하는 너의 생일
오늘 난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내가 가지지 못했던, 내가 가졌어야 할 12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가사로 들려진다. 그리고 그 가사는 잘못된게 없다. 12살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축복 속에 자라야 하는 나이인 것이다. 정서적으로 혼자 커 온 나에게는 누군가가 축하한다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위의 가사들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가사가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세루리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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