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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남들의 말을 잘 듣고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터무니없더라도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 임용고사를 볼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도 않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에

고향에 내려와서 부모님과 심각한 소모적인 충돌이 일어날 때도,

그다음 해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와 대학을 다녔던 지역의 기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모욕과 쌍욕을 받았을 때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나 자신의 열망은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내가 우습게 여기고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인생에서의 그 출발 자체가 나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강요에 의한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가족의 강요로 인해서 교대가 아닌 다른 대학교를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싫었을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교사의 교권이 지금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 최고의 황금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그만두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내 인생의 중요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마음속 한구석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하기도 싫은 임용고사를 보고 교사가 되었는가 떠올려본다면 그 당시의 나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만약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익명의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교사 그깟것 몇 대 몇 안 하는 것을 통과 못하면 니가 뭘 할 수 있겠냐?'

'교대 나온 사람들은 별 능력도 없던데 초등학교 교사라도 되어야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초등교사가 싫어서 안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그깟 것 몇 대 몇 안 하는 초등 임용고사를 통과 못해서 초등교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싫어서 꾸역꾸역 시험을 보았다. 결국에는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10 몇 년 전, 초임 교사 생활을 하면서, 수백 수천 개의 교권침해 사례가 올라오는 초등교사 커뮤니티인 인디XX에도 쓸 엄두조차도 나지 않는 일들을 겪었고 몇 년째 병원도 다녔고 지금도 정신적인 붕괴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그만두기 1년 전까지도 계속하여 힘든 학급을 맡았다.

 

그러면 왜 초임때 교사를 그만두지 않았는가. 나는 또 이러한 생각을 했다.

'내가 교직에서 최고로 행복할 때 교사를 그만두어야겠다. 그래야 내가 교사를 그만두게 된 이유가 교사가 힘들어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원래 이유처럼 내 의지로 시작해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남들의 시선과 나만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이유를 만들었고 증명을 하려고 하였다. 

게다가, 그 와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어서 교사를 그만두기 어려운 상황도 생기게 되었다.

 

계속하여 교직 생활을 하던 중, 2020년 코로나 발생 시기때 긴급돌봄 업무를 맡게 되었다.

원래 학교에서 돌봄 업무도 힘든 일이지만 갑자기 코로나로 인해 업무 분장에도 없는 '긴급' 돌봄 업무까지 추가로 맡게 되었고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업무는 거의 사라진 반면에 돌봄 업무는 배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생겼다. 학교 전반의 업무를 담당하며 학교에서 업무가 제일 많은 교무부장조차도 나를 보며 '선생님이 학교에서 제일 바쁜 것 알고 있다. 힘내라.'라면서 나를 위로할 정도였다.

 

매일 학급을 위한 온라인 줌 수업을 준비함과 동시에 긴급돌봄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파악하여 교육청에 보고하고, 도시락 업체와 계약하여 매일매일 점심도 준비하고, 방과후 돌봄 강사 면접 및 계약, 출결관리 등 일만 하다가 앓아누운 적도 많았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학교 교무실무사와 연락하며 긴급돌봄 아이들 명단을 정리하고 있을 때 뉴스를 하나 보게 되었다.

 

서울시교육감이 "학교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월급만 받고 일을 안 하는 집단도 있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돈만 받고 일을 안 하는 집단은 맥락상 분명히 '교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화가 난 교사들은 서울시교육감에게 항의를 했으며 서울시교육감은 짤막한 사과문을 기재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서울시교육감 눈에는 매일 수업을 하며 집에서도 밤 늦게까지 긴급돌봄 업무를 하는 나 같은 교사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긴급돌봄 업무를 맡는 전국의 수천 명의 초등교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건지 너무 화가 났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교육감은 정말 싫다.

 

비단 코로나 기간 뿐만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그저 월급쟁이이며 월급충, 방학만 있어서 꿀 빠는 직업. 아이들을 생각하기보다는 돈만 생각하는 직업. 교사만 해서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고 생각도 초딩 수준인 직업일 뿐이었다.

 

글쎄.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가 맡았던 모든 학급에 교사를 해보라고 시키면 일주일도 안되서 다들 줄행랑을 칠 텐데.

 

한 번은 내가 자주 가는 동네 맘카페에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교사들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아라, 그래도 요즘 선생님들은 다들 최선을 다한다, 나는 학생에게 심각한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참고 교사직을 한다 등의 짤막한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열개 정도 댓글이 달렸다. 댓글 하나 정도만 요즘 선생님들 고생한다는 것 안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그래요? 그래서요? 이런 댓글이었다. 어떤 댓글은 요즘 선생님들이 스승이냐, 공무원일 뿐이지.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요? 나는 학창 시절에 선생님한테 폭행당한 적도 있는데 요즘 선생님들이 겪는 것은 업보일 뿐이다.라는 글이었다.

 

내가 임용고사 준비생이었을 때, 나는 내가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나를 증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 이상 너의 능력이 없어서 초등교사가 되네 못되네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고 떳떳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교사가 되니 나는 또 다른 비난에 직면하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월급충, 꿀 빠는 직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나를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무척 허무해졌다. 도대체 그 익명의 사람들의 정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그 사람들에게 나를 증명한다고 한들 나를 귀하게 여겨줄 것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일말의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증명을 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자의로 그만두었고 원점보다도 더 안 좋은 상황에 돌아왔다.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진로나 계획을 설정할 때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거나 증명하려는 노력은 아주 조금도 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사회의 관습, 혹은 나 스스로의 존재 가치의 증명이나 압박감에 내 인생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도 증명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나이와 관련하여 내 귀를 거스르게 하는 것이 있다. 여자 나이 40대면 아줌마이고 이모이고 늙었고 직업의 기회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줌마, 이모라고 부르고 나의 직업에 대해 왈가왈부한들 그것은 그들의 몫이고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사회의 시선에 맞추어 단장을 하고 외모를 꾸미고 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설사 그 목표를 이룬다 한들, 여전히 날 선 말들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세루리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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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어느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갔다. 
서울에서 우리 가족은 우리 어머니의 친구들을 만났다.
미국에서 온 우리 어머니의 친구 가족, 그리고 서울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친구 가족과 우리 가족은 한강에서 만났다.
 
LA에서 온 우리 어머니 친구(어머니는 그분을 LA엄마라고 친근하게 부르라고 했다.)에게는 어린 아들과 딸이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살다 온 교포라서 그런지 한국의 어린이들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제일 기억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부자 친구와 그 분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부자 친구분은 매우 늘씬하고 아름다웠고 그분은 딸을 데리고 왔다. 아들은 미국 유학 중이라고 하였다. 
그 딸은 나보다 몇 살 어린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며 뼈대도 가늘고 날씬하였다. 편한 나시 옷을 입고 핸드폰을 목걸이에 차고 있는 그 아이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밝고 명랑함은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꾸밀 줄도 모르고 대충 어머니가 준 하늘색 폴로 셔츠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나는 난생처음으로 무언가와 대면했다는 느낌과 낯설다는 감정, 비교 의식을 느꼈다. 엄마의 LA 친구분의 자식들에게 쭈뼛쭈뼛한 나와는 달리 그 여자아이는 밝게 그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며 친근하게 대화도 나누었다. 
 
그때 보았던 영화도 기억이 난다. 권상우와 하지원이 나왔던 [신부수업]이라는 영화였다. 좌석이 없어서 그런지 거의 맨 앞 좌석에서 눕다시피 하면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여자아이가 명랑하게 웃으며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밤에는 모두 다 한강유람선을 탔다. 캄캄한 밤에 한강변에 밝게 빛나는 집들은 여행의 이정표가 되는 것 같았다. 그 때 어머니의 친구는 한강변의 집을 가리키며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했다. 월드메X디앙이라는 아파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강변의 아파트는 꽤 비싸고 고급 아파트였다. 내부 인테리어를 하는데 2억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2억이면 무척 큰돈이지만 20년 전에는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한강 유람선을 타고 어머니의 LA친구분의 차를 타고 그분이 한국에 보유하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하룻밤 자고 떠나기로 했다. 가는 길 중간에 어머니의 부자 친구분이 살고 계신 월드 메X디앙에 그 친구분과 딸을 중간에 내려주고 갔다. 그 딸은 명랑하게 인사를 하며 할머니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갔다.
 
2004년의 서울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무거움과 불편함이 생겼다.
 
명랑하고 아름다운 어머니 부자 친구 모녀도 떠올랐을뿐더러, 그것에 대비해 우리 어머니의 처지와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나를 낳고 수학 과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IMF 무렵에는 학원도 경영하였다. 교사였던 아버지와 과외를 하는 어머니 덕에 생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그것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1000원짜리 물건 하나 사는데도 손이 떨릴 때가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이과 500명 중에서 1등을 한 적도 있다고 하였고, 결국에는 지방 국립대를 가기는 했으나 교직 이수를 통하여 수학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농담을 하면서 자신의 친구 중에 공부를 정말 못했던 동창도 부자를 만나서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 또한 나에게는 무언의 의무감으로 느껴졌다.
 
어머니는 단순히 수학 과외만 한 것이 아니라 가정일도 병행하였다. 수학 과외는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직장과 가정 일은 분리될 수 없었다. 
 
2004년 서울로의 가족 여행 후에, 나의 사고의 방향은 이런 어머니의 처지를 지나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정말 잘했지만 현재는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가 가엾다, 내가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에 나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어도 참는 방향으로 지냈고, 더욱 순종적이게 되었다. 대학 입시에서는 아주 조금의 의사 표시는 해보았지만, 결국에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20년이 지났고 2024년이 되었다. 어렸을 적 지방에서 살았고 서울은 아주 가끔 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서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고 가끔씩 드라이브를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의 취미는 한강에서 공용 자전거인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릴 때마다 나는 '서울만 한 도시는 세계에도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울을 사랑한다.
 
내비게이션을 타고 한강 공원을 찍고 운전을 하는 중,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 골목을 헤치며 운전하는 중, 나는 20년 전에 보았던 그 월드메X디앙 아파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강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나는 차 안이 떠내려갈 정도로 한참 동안을 펑펑 울었다. 2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20년 전에 했던 나의 마음가짐이 나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했던 다짐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에 떠올려보면, 그것은 정말로 필요가 없었던 다짐이었고, 내가 이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의무였을 뿐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와 결혼한 것도, 나를 낳은 것도 어머니의 선택이었다.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가정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 남을 배려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커 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의 선택을 불행하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바라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나의 희생적인 선택이, 결론적으로는 나를 불행하게 하였기 때문에 주변인들도 곤란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였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싶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2004년 여름이다. 그때의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제발. 20년 후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다가와주기를 바란다. 지금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의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해주었으면 한다. 21년 전, 15년 전의 잘못된 생각들이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된 것처럼 지금의 나도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은 미래의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현명한 나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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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었던 곳

생각 / 2025. 4. 9. 10:05

작년에 기간제 했던 학교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교실을 나오기 직전에 사진을 찍어보았다.

 

선생님들도 다 퇴근하고 아이들도 없는 시간의 학교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나의 정체성 중의 상당 부분이 교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지 말이다.

나의 지금부터 40대까지 약 10 몇 년간의 시간을 더 거친다면 그때는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교에서 저녁 시간까지 축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과학 선생님과 작별을 하며 학교를 나왔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묘하다. 모든 것을 포근히 감싸 앉는 시간이다.

밤이 있으면 다시 낮이 있듯이 고요했던 학교도 다음 날 아침이면 학생들의 발걸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때가 10월 말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날씨가 딱 선선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이 순간의 기억이 참 포근하다.

 

내가 있었던 마지막 학교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계약이 끝난 다음날 다시 학교에 와서 사진을 찍었다.

 

땅은 단단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계속하여 단단할 것만 같은 이 땅도 시간이 지나면 녹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고 나서 3개월이 지났다. 

지금 내가 있는 지역은 겨울에는 -20, -30도 되는 지역이지만 4월이 된 오늘 밖을 나가니 덥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학교 운동장도 녹지 않았을까 싶다.

 

자연에서 두렵지만 가장 경이로운 점은,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내가 망하든 

꽃은 피어나고 낙엽은 지고 자연은 순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게 나의 마음을 어쩌면 편안하게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갈 것이라고 몇 달 전에 생각했다.

그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 속에서 잠시 멈추어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작년 한 해와 작년의 그 차가운 겨울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024년의 나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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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캐나다에서 40일동안 있었지만 계속 비가 내리고 어디를 놀러다니고 싶지도 않아서 주로 한 일은 집에만 머무르는 것이었다. 거의 연속으로 열흘 넘게 비가 내리고 날이 흐렸지만 어제는 날이 예외적으로 좋았고 그래서 시애틀로 하루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하였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시애틀까지는 차로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 정도로 가까워서 육로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코스이다. 북미 대륙으로 따지자면 200km 남짓이라서 가까운 거리이고 비슷한 듯 살짝 다른 문화를 가졌다.
 
나는 어제 미국으로의 하루 당일치기 여행 중 깨달은 점이 많았고 그것이 어쩌면 나의 현재로서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이다.
캐나다에서도 가게에서의 "How are you?" 등의 질문을 많이 받은 적이 있었고 "Have a nice one." 등의 인사를 받은 적이 많았다. 그런데 어제 다녀왔던 미국에서는 더욱 많은 스몰 토크를 겪은 것 같다.
 
스타벅스 1호점에서 텀블러를 사려고 줄을 사는 도중에 한 여자가 나의 모자를 보고 모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에 있는 빈티지 샵에서 샀다고 말을 할 수도 있었으나 왠지 말을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냥 감사하다고 하였다. 또 시애틀의 전망을 볼 수 있는 케리 공원에서 한 아저씨가 나를 보고 당신은 멋진 모자를 가지고 있고 멋진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해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후에 그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전망을 찍으면서 나에게 뭐라고 하긴 했는데 뭔가 잘 이해도 안 되고 그래서 적당히 웃으면서 다른 장소로 갔다. 
 
정말 북미 사람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스몰 토크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번째 스몰토크는 내가 스타벅스 리저브에서 커피를 마신 후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는 중 버스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보고 어떤 젊은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전문 사진작가인지, 아니면 관광객으로서 찍는 것인지 물어봤다. 나는 관광객이라고 하였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웃으면서 멋지다고 하고 갈 길을 갔다. 그래도 세번째 스몰토크는 내 자신이 마음이 편하고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스몰 토크가 어색하다. 어색하다는 이유는, 나는 스몰 토크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향적이라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즐겁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큰 에너지가 든다. 또한, 일회적이고 단발적인 만남에서 스몰 토크는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아직 감이 잡히지도 않으며 또한 내가 아직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에 스몰 토크를 내가 시도해본 적은 있었다. 작년 미국 LA 여행을 위해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허츠 렌터카로 간 적이 있었다. 중년 여성 직원은 여자 혼자서 미국을 렌터카로 여행하는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미리 준비한 "I'm the best driver in South Korea." 라는 문장을 말했더니 그 분은 웃으면서 좋아했다. 그게 내가 했던 유일한 스몰 토크에 대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사실, 그 때 말한 문장도 말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스몰 토크는 생존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언어라는 것은, 외국어도 마찬가지만 자국어로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때가 있다. 
나는 학창시절과 대학교 1학년 정도까지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으로, 남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친해져 본 적이 거의 없는 성격이었다. 내향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내향적인 성격으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내향적인 성격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친구들 말고 남들에게 어떻게 대화를 걸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옆에 앉은 한 남학생은 나에게 벙어리가 아니냐고 말한 적까지 있었다.
 
대학교는 집에서 몇 시간 떨어진 타지에서 다니게 되었고, 나는 완전히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에게는 커다란 위기감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생존과도 직결되었다. 대학 입시 만큼의 큰 어려움에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어색하더라도 남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을 했다. 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문장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심지어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보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겠다는 대본을 많이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속상할 때가 많았다. 남들은 타인과 친근해지기 위한 성격을 타고났는데 나는 이렇게 커다란 노력을 해야만 겨우 남들과 비슷하게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게 유전이든, 환경적 요인이든 내가 극복해야만 했던 것들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남들과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는 더욱 친해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2학년 때에는 대학 동아리까지 들면서 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해외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스몰 토크를 해야 하는 상황은 대학교 1학년 때, 마주해야만 했던 갑작스럽고도 부담스러운 현실과 거의 비슷하다. 많이 연구하고, 부딪치면서 스몰 토크의 범위와 나만의 방식, 나의 영역을 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국어든, 외국어든 새로운 환경에서 남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안정적인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새롭고 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 필요한 성장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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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생각 / 2025. 3. 10. 06:19

Blessing in disguise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는 전화위복이다.

나쁜 일인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복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2012년의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불행인 줄로만 알았던 그 일들을 내가 복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간제 전담을 했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씨XX이라는 욕을 먹었을 때, 한 반 전체가 나의 수업을 보이콧했을 때, 그 때 임용 준비생인 나는 이렇게 욕을 먹는 직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였다.

그 말을 내가 듣고 따랐었다면, 그것을 내가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고 그렇게 했더라면,
공립교사로 임용된 후 유황불을 걷는 듯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그 때는 2012년이었고, 교대 졸업생은 모두다 교사 아니면 다른 직업을 하지 않는 시대였다. 예외적으로 같은 과의 선배 한명이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스포츠 아나운서를 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임용고사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직업조차 계속 도전하여 합격하고 그 후에 그만두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생각했디.

그 상황을 거시적인 방법에서 비틀어보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나에게 어려웠다.

그 기간제 교사를 하며 보란 듯이 임용고사에 합격했었어야 했는데 그것조차 나는 해내지 못했다. 내가 보았던 지역이 전년도에 비해 커트라인이 갑자기 12점이나 올랐고 나는 1점 차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1점 차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사실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만약에 아예 2012년에 임용고사를 보지 않고 나의 인생의 책임감과 선악에 경중을 두지 않았으며, 2012년에 임용고사에 떨어진 후 나의 다짐대로 벌어둔 약간의 돈으로 내가 가고 싶었던 해외로 도피하였다면, 부모의 뜻에 따라 그 후로 강제로 노량진에 가지 않았다면 삶의 방향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안정되게 살고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실수로부터 나는 배워야 한다.

지금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안정을 찾는다면, 그것 또한 내가 가진 상황을 비틀어 해석하지 못하고,
불행으로 가장한 축복을 놓치는 상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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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온지 이제 17일차가 된다.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여러 가지 뉴스를 많이 보았다. 
캐나다는 망하고 있다. 이민자들 때문에 캐나다는 망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제 캐나다는 중국인이 아닌 인도인들이 이민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내가 일시적으로 사는 버너비 지역의 아파트도 대부분이 이민자 계층이다.
 
버너비 메트로폴리스 쇼핑몰을 가면 대다수 사람들이 이민자들이고 백인은 간간히 보인다.
그 이민자 중의 70, 80퍼센트는 인도계 사람들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것이 내가 캐나다를 사는데 중요한 것인가 물어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민자들이 많은 것이 나에게는 큰 단점이 되지 않는다. 
나는 현재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할 뿐, 그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기도 한것 같다.
 
작년에 미국 서부를 혼자 렌터카를 빌려 여행했을 때,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17 Miles drive라는 곳을 가 보았다.
해안가의 압도적인 풍경에 감명을 받아 눈물이 나왔다.
그 때 나는 북미의 큰 장점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그 나라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 여행을 가서 내가 겪었던 감동의 크기가 중요했을 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라틴계인지, 백인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누가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가 그 곳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7년 전에, 아이슬란드 여행을 갔을 때 공항에서부터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공항에서 아이슬란드 유심 칩을 샀는데 거기 있는 백인 여성 직원이 유심 칩을 카운터에 패대기 치면서 주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슬란드에 온 것은 유심칩을 패대기 치는 여자를 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오로라는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무척 고요한 설국이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러 간 것이었다.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나는 캐나다에서의 경험이 중요할 뿐이었다. 내가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무척 독립적인 성향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지낸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사람들은 다 비슷한것 같다.
얼마 전에 버스를 탔는데 인도인인지 파키스탄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중일 외모를 구별하기 어렵듯이 나도 인접 나라의 사람들은 구별하기 어렵다.) 젊은 여성이 한 중국계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려고 한 것을 보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정중하게 사양은 했으나, 우리나라의 노약자를 공경하는 문화가 다른 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에는 인도인들이 많으며, 이 근처에는 캐나다 대학을 다니는 인도인들도 많다. 터번을 쓴 인도계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떠드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뭔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면 혼자서는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그 사람들도 혼자서 다닐 때면 조용히 다닌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사람이 뭉쳐있으면 목소리가 커지듯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민자가 많은 밴쿠버가 마음에 든다. 밴쿠버에는 이민자가 많고 Service Canada와 같은 공공기관에도 인도계, 슬라브계 등 다양한 직원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쓰지만, 가끔은 내가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물론 내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영어에도 인도식 영어, 러시아식 영어, 중동식 영어 등 참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영어에 조금 서툴더라도 나도 같은 이민자 범주에서 받아들여지고 내가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참 좋다. 한 인종만 있는 외진 시골 마을에서 혼자서만 이민자로 지내는 것보다는 배타성이 덜 할것이고 그것이 큰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는 상황도 있다. 
만약 내가 20대 인도계 여성 아르바이트 생들이 가득찬 팀 홀튼에서 일하게 된다면 과연 그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적의 차이도 있고 세대 차이도 있어서 나는 분명 겉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고용주가 나를 채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용주도 인도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인 이민자가 캐나다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내가 이 동네에서 몇 주 지내본 체감상 인도계 이민자들은 70퍼센트, 중국계가 20퍼센트, 그 다음이 나머지 나라인 것 같다. 한국인들도 밴쿠버에 많이 살고 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캐나다 중 BC주에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또 그들 중 대부분이 광역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인이나 중국인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어딘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한국인들은 점 조직과도 같다. 자신만의 일을 하면서 밴쿠버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나도 밴쿠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 덕분에 편리한 점이 많았다. 한인마트에서 한국 음식을 살 수도 있었으며 아시아 마트에서도 한국 음식들을 살 수 있었다. 한국어로 운영하는 응급처치 수업을 듣기도 하였으며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있는 은행에서 계좌와 신용카드를 만들기도 하였다. 비싸기는 하지만 가끔 한식당에서 국물 있는 찌개를 먹기도 한다. 한국 직원이 운영하는 통신사 매장에 가서 유심 번호이동을 신속하게 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인종 문제가 아니라 월급에 비해 무척 비싼 물가와 렌트비일 것이다.
그 렌트비나 집값도 부동산 쇼핑을 하는 어떤 나라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서 이민자들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한참 아파트 공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파트 공급이 많아지면 집값이 떨어질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주거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밴쿠버도 대도시이며 결국에는 똑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작년에 LA에서 며칠 운전을 한 적이 있다. LA도 생각외로 운전이 거칠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대도시에 몰리고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서로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서울, 인천에서 운전을 했을 때도 사람들은 서로 분노가 많았고 고백하자면 나도 그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을 때가 정말 많았다. 이곳에서도 별것도 아닌 것으로 서로 거칠게 빵빵댈 때가 많은 것을 보니 여기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마카오에 갔을 때도 그러한 풍경을 보았다. 마카오는 정말로 작은 도시이고 차도가 좁아서 빵빵대는 일이 많다. 어떤 운전자가 평안한 무표정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무척 세게 경적을 울려대는 것을 보았다.  
 
퇴근 길,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삶에 찌들고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도 그들 중 한명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나 대도시와 수도는 인구 밀집도가 높아서 사람들이 찌들어 있고 지방으로 갈 수록 사람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다는 것은 똑같다.
 
아무튼 나에게는 캐나다에 누가 사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이 곳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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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로 인해 엄청난 양의 비에 잠긴 학교

 
오늘은 태국 이야기와  나의 생각들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6년 전, 방콕 근교로 파견 교원을 나간 경험은 다양한 문화적 교류와 체험과 더불어 이제껏 내가 가져왔던 가치관에 큰 변화가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즐겨 갔던 학교 앞의 버블티 가게. 오벌틴 버블티가 정말 맛있었다.

방콕 근교의 학교에 약 2개월 반 정도 파견교원을 가면서  나는 기대 이상의 경험을 했으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학교 앞 간판도 없는 가게에서 먹었던 팟 끄라파오 무 껍. 불과 2000원인데 훌륭한 맛이었다.

각 학교에 파견되기 전, 선생님들은 방콕의 한 대학교 건물에서 언어와 문화 강의를 몇 주간 수강하였다. 그 곳에서도 강사님들은 무척 친절했으며 선생님들이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해주었다.
 

학교에 등교할 때 하나씩 사 먹었던 태국식 찰밥과 돼지고기 꼬치. 환상적인 맛이다.

파견된 태국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따뜻하게 환대해주었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남는다. 태국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아시아티크에서 먹었던 두리안 아이스크림

2000년대 초반, 나는 중학생이었고 그 때의 나는 수십가지의 꿈을 가진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때는 한창 대학생들의 해외연수, 배낭여행의 붐이 일어났던 시기였고 대학생들은 한 학기 휴학을 하고 해외여행을 갔던 시기이다. 나는 내 단짝 친구와 함께 학교 도서관에서 한비야의 책을 읽으며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꾸었고 신문에서 대학생 배낭여행, 해외의 명소 기사를 찾아 스크랩하여 모아두었다. 그 당시 케이블 TV의 디스커버리 채널에는 해외 명소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나는 주말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장소들을 거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으면 할 정도로 맛있는 애프터유 빙수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때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할 계획도 가졌고 대학교는 노어노문학과를 가서 다른 나라의 언어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원하는 대학을 가려는 나에게 부모님은 학과가 비전이 없다면서 교육대학교를 권유했고 초등학교 교감 승진을 앞두고 있는 고모까지 집으로 불러서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방콕 버스터미널 근처 카페에서 먹었던 모카 초콜렛 라떼

결국에는 나는 부모님의 권유로 교대에 갔다. 대학교에서도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건지 생각하면서 혼란스러운채로 교내를 거닐었다. 4학년에는 휴학도 하려고 했으나 부모님은 반대했고 친구들도 우리랑 같이 졸업하자며 나를 붙잡았다.
 
지금이야 교육대학교 재학생 절반이 다른 진로를 모색하고 수능을 보거나 자퇴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몇년 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으며 교대를 졸업하면 100% 교사가 되고, 임용고사에 떨어지면 붙을 때까지 계속 시험을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임용고사에 떨어졌으며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부모님과 갈등도 무척 커졌다. 결국에는 그 다음해에는 고향을 떠나 내가 대학을 다녔던 지역의 기간제 교사로 1년간 일하면서 시험도 보았다.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씨XX이라는 소리도 듣고 떠드는 반 때문에 화가 나서 문 밖으로 나갔는데 그 학생들은 환호를 하면서 박수를 쳤고 2학기 때는 아예 나를 비웃고 내 수업을 보이콧하다시피 하는 반도 있었다. 그 반은 담임선생님이 내가 수업하는 중 맨 뒤에 서서 학생들을 감독해야했을 정도였다. 10몇년이 훨씬 지났고 교사로서 겪을 수 있는 일 이상을 많이 겪은 나지만 학생들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나는 기간제 교사 겸 임용고사 준비생이었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욕을 먹는 직업을 굳이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임용고사를 봤다. 만약에 내가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초등 임용고사 그깟거 몇대 몇 안하는 시험도 떨어져서 못 붙는데 니가 뭘 할수 있겠어?' 라고 나를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만두더라도 임용고사에 붙고 나서 그만두자고 생각을 했다.
 

끄라비에서 먹었던 철판 아이스크림. 정말 맛있어서 매일 먹었다.

몇년 전, 엄마와 갈등이 생긴 나는 울먹이면서 도대체 나를 왜 교대에 보냈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는 내가 착하고 교사와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여자한테 좋은 직업이고 워라밸도 있고 방학도 있고 좋은 직업이라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그렇게 교대에 가기 싫다면 왜 강하게 말하지 않았냐고 말했다.
 

엄마는 힘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했다.


몇십년간 지켜온 내 신념이 정말 허무하게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그만두는 것이 이렇게 쉽게 결정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내가 그 때 교대에 가지 않는 선택을 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었다. 

가족을 위해 나를 참고 희생했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정작 내 희생을 가족들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분개심이 컸고 지금껏 살아왔던 30몇년 인생의 가치관이 그 때 이후로 아예 바뀌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후 부모님과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고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가서도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엄마가 말한 그 워라밸과 방학이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 하찮은 이유였다. 임용 전 기간제 교사로 겪었던 일, 발령 초기에 겪었던 일, 그 후의 일들이 있었기에 나에게 워라밸과 방학이라는 것은 직업으로서의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나는 운이 많이 없고 또 없는 케이스였다. 고작 그깟 하찮은 이유 때문에 사람 인생의 중요한 것을 마음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 너무 화가 났다.
 

다시 가고 싶은 끄라비 투어

엄마가 너 교대가 라고 해서 나는 그래요 라고 응했고 나의 소중한 인생을 그냥 남에게 주어버리는 선물마냥 쉽게 주어버렸다. 내가 안경을 쓰고 생긴게 순하고 착하게 생겨서, 권위적인 부모님에게 아무 말도 못해서(아니 그냥 내가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인생의 결정 단 하나로 인해 나의 20대 초반, 20대 중후반, 30대까지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 버린 것이었다.
 
나는 효도와 전통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비록 어렸을 적 나는 해외에서 일하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갈망하였지만 90년대 학생들에게 주어진 '효도 사상', '어른에게의 순종'의 가치도 내 마음속에 양립하였다. 특히나 90년대, 2000년대 초반에는 부모님이 말하는 것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사상과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학교 인삿말이 '효도하겠습니다.'이고 나는 그 인삿말을 극도로 싫어한다.) 
 
부모님은 내 안의 열망을 알지 못했고 알 생각도 없었고 나는 그저 조용하고 기르기 편한 자식이었을 뿐이었다.
 

끄라비 프라낭 해변

이러한 양립된 나의 마음 때문에 나는 항상 괴로웠다. 차라리 순종적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유롭거나 둘중에 하나면 마음이 편할텐데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나의 마음에 혼란을 주었다.
 

끄라비 아오낭 해변의 일몰

그 사상은 내가 교사가 되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진정한 선과, 내가 사회인으로 가져야 할 책임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발령 초기에 나는 학부모들이 나에게 소리지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학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고 자식이 엇나가는 것을 어디에 해소할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교사의 책임은 그들이 악쓰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감정을 해소하게 하고 그들의 감정이 조금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발령 초기의 생각이고 지금은 전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가정에서 힘들고 부모님과 힘든 것을 학교에서 풀고 엇나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나에게 악을 쓰고 고함 질러서 그것이 해소된다면 그것이 나의 소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콕 왓 아룬 사원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고 한다고 한들 그들의 사정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마음대로 한다고 한들, 그들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깨달았다. 
내가 감내했던 행동들이 결국에는 좋은 결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XX을 생각하고, 견디고 참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크리스탈 볼로 찍은 아오낭 해변

태국에 파견교사로 다녀온 3개월 후, 나의 사고방식은 180도 달라졌다.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때에 진정한 선이 이루어지고 상호간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국에 있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착했고 선생님들, 태국 사람들도 모두 나에게 잘 해주었고 태국 생활 자체를 즐겼다.
태국에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었고 주말에는 파견 기관의 허락 후 태국의 이곳저곳도 여행을 하였다.
내가 보냈던 3개월은 내 인생에서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내가 파견 갔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나와 짝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들 마음 속에 좋은 것이 있으니 학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어요." 
나는 거창하게 무언가를 한 것이 없는데, 이러한 칭찬을 받아서 감사할 뿐이었다.
 
태국 선생님들은 내가 수업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정말 많이 찍어주었으며 그 안의 나와 학생들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웃는 표정밖에 없었다. 
 
나는 태국에서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즐기며 누리는 생활을 했지만 학생들에게 더욱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치앙라이의 청색 사원

그 전까지는 나는 진정한 선이란, 내 의지와는 다르게 교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말에 순응하는 것, 미국 대학원과 연계되어 있는 국내 대학원에 합격하였음에도 가지 말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 학부모의 악을 듣고 견디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잇는 것이다.
 
(물론 나는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며 내가 생각하는 선은 그저 머릿속의 한 관념이며 강박일 뿐일 수 있다.)
 

우기로 인해 물이 많이 불어났던 꼬창 여행

물론 나는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에도 견디고 참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첫해에 긴급돌봄 업무를 맡아서 힘들게 일하기도 하였고 엇나가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붙잡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신문고에 올린다느니 자기 애가 욕한 것이 선생님 책임이라느니 하는 소리도 들었고 수업 중에는 할머니가 전화가 와서 나에게 악다구니를 쏟으며 작년 담임선생님 일까지 내 잘못으로 돌리며 수업을 방해한 적도 있었다.
 

홈디포에서 본 Home is where your heart is 라는 문구는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으며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나는 운이 없었다.
교사로서 힘든 상황을 맡는다는 것은 훈장이 아니다.
또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향에 있는 어느 분들의 말처럼 말이다.
(교훈주의가 정말 싫다. 그저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범죄를 당한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고 그렇게 강요할 수도 없다.
 
내가 20년 전에 겪었던 일들을 지금도 기억하듯이 한국에서 교사 생활을 한 기억도 20년이 지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20년 후에 악몽으로 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반복적으로 끔찍한 꿈들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태국에서의 3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다른 나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들, 좋은 상황은 많이 있을 수는 있지만
딱 태국에서 얻었던 최상의 행복은 얻기가 힘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다음 생애, 그 다음 생애에서도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바라는 학생들이다.
 

다른 직업군에서도 해외 파견이라는 것은 많이 있지만 교사로서의 해외 파견은 여타 직업과는 다른 큰 장점이 있다.
 
그 나라 현지 학교에 파견이 되어 현지 아이들과 소통하며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다.
 

태국에서 정말 좋았던 것은 착하고 예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물론 태국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태국의 문화도 배웠고, 멋진 장소들도 다녔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또 와서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태국에서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여러 가지 색칠 도구, 학습 자료들을 많이 가져왔으며 과학 시간에 활동하고 남은 카메라 옵스큐라도 가져갔다. 그리고 현대자동차에서 후원받은 자료들도 많이 사용했다.
학생들은 생전 처음 보는 학습도구, 자료들을 보며 신기해했으며 그 활동을 진심으로 즐기고 행복해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뭉클해졌다.

태국 활동 중, 아태교육원에서 교사 수업 참관을 위해 직원(전문관)이 학교로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가져온 팽이와 여러 자료들을 사용해 문화 수업을 했다. 팽이 만들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활동에 몰입하고 자신들이 만든 팽이를 소중히 여기는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그 예쁜 모습에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영향력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준 태국의 학생들과 태국 선생님들, 태국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파견 경험 등에 감사하다.
 
언젠간 내가 받았던 사랑을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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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파이어

생각 / 2025. 2. 6. 23:44

나는 신파를 정말 싫어한다.
그 감정의 과잉, 억지 눈물 등은 사람을 정말 질리게 한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학교의 행사 중 대표적인 신파는 수련회 중 캠프파이어며
인터넷에서 주기적으로 끌어올려져서 학교를 조리돌림하는데 사용되는 소재이다.
 
물론, 군대식 교관과 억지 슬픔을 짜내는 수련회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7,8년 전에 학생들을 이끌고 수학여행을 갔을 때 만났던 교관들은 과거 20년전의 교관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교관들 스스로도 우리는 그러한 군대식 교관이 아니며
학생들을 안전하게 지도하고 즐겁게 수학여행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학생들에게 화내거나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는다.
학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학생들을 들었다 놨다 휘어잡는 노련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전문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안전을 위해 수학여행에서는 캠프파이어를 하지도 않는다. 
 
나도 20 몇 년 전, 6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밤이 되자 수학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캠프파이어 의식이 시작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노래를 부르고 손에 손잡고 원을 그리며 돌며 의식은 고조되었고
점점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며 교관은 점점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부터 시작해서 온갖 미사여구와 교훈이 짬뽕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라는 말까지 꺼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훌쩍이기 시작했다. 교관의 말은 분명히 터무니없고 괜히 억지 눈물을 짜내고
감정의 과잉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이었다. 
 
훌쩍이던 아이들은 이제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과 함께 펑펑 울었다.
 
정말 슬퍼서가 아니라 나도 울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 해에, 나는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 때 갔던 수련회에서는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6학년이 되어서 나를 괴롭혔던 애와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6학년이 되어서도 완전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은 없었지만 반에서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생겼다.
 
나도 드디어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5학년 때 캠프파이어에서는 결코 울 수 없었고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6학년 때의 캠프파이어는 기나긴 왕따의 끝이었으며 나는 아이들과 함께 펑펑 울음으로써 내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카타르시스적인 감정이었던 것이었다. 나도 반 아이들처럼 평범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열망이 실현되었던 순간인 것이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 그 전날 편지를 썼는지 5학년 때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작년에는 미안했다며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코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수학여행 때 감정이 고조되어서 쓴 글이겠지.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닌가? 어설픈 글 몇 마디로 나의 평생의 고통이 쉽게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그 편지를 구겨서 버렸다.
 
가끔은 그것이 눈에 훤히 보이고 바보같을지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할 때가 인생에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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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태국 방콕 근교의 한 초등학교에 파견 근무를 간 적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외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나였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나와 해외와는 큰 연관이 없을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운이 좋게 코로나 직전에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몇달간 태국에 다녀왔다. (코로나가 유행하고 몇년 동안은 프로그램이 중단되었고 그 직전에 참 운이 좋게 다녀온 것이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태국에 가서 태국 문화와 언어 등의 교육을 받고 2달 반 동안 방콕 근교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 학교 당 2명씩 파견이 되었고 나는 나의 짝 선생님과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로 파견이 되었다. (짝 선생님은 중등이라서 중학생을 가르쳤고 나는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사뭇쁘라깐의 한 공립 초등학교



학교는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는 특히 분홍색 벽과 작은 간판이 좋았다. 나는 태국의 학교들은 내가 갔던 곳처럼 다 예쁘게 꾸며져 있을줄 알았지만 다른 태국의 학교를 살펴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학교 도서관 건물


그 학교의 초등학생들은 외국인 선생님을 처음 보았다고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나와 짝 선생님을 신기해했다.

많은 학생들이 그랬지만 특히 6학년 학생들은 나와 짝 선생님이 근무하던 교무실로 많이 찾아왔다.

그 학생들은 태국어를 할줄 알고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내 앞에서 번역기에 태국어로 글을 쓴 다음 영어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대다수는 이런 내용이었다.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저는 선생님이 이 학교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감동을 받았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전교의 학생들이 외국인 선생님 수업을 경험하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나는 2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양한 학생들에게 수학, 과학, 영어를 가르치도록 시간표가 짜여졌다.

학생들에게 예상치 못한 사랑을 받았고 그건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누가 나한테 이 삶이 여기까지라고 해도 오히려 만족했을것 같을 정도였다. 아이들과의 아름답고 예쁜 추억을 안고 삶에서 더 나쁜 기억 없이 마무리한다는것이 참 좋을테니 말이다.

태국의 학교는 특이한 행사가 참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광고 회사들이 학교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수업 시간은 하지 않고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광고 회사의 광고를 듣고 물건을 받는다. 태국의 유명한 두유 회사도 프로모션 겸 학교에 방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내가 예정된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수업을 안 해서 좋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래도 괜찮나 싶었다.

특히 나를 제일 좋아하는 6학년 학생들 수업 시간과 그런 행사들이 많이 겹쳐서 한동안 6학년 학생들을 보지 못했다.

6학년 수업이 들었던 어느날,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이러한 말을 했다. 학교 선생님들끼리 근처 사원에 가는데 선생님도 따라가는게 어떻겠냐 라고 말이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와 짝 선생님께 평소에도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고 태국 음식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의 이러한 제안이 그러한 마음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교장선생님, 저는 6학년 수업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 가지 않고 6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흔쾌히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전망이 좋았고, 시원한 맞바람이 잘 들어왔던 4층의 6학년 교실


내가 수업을 할 지 안 할지 궁금해했던 6학년 학생들은 내가 남아서 수업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예~!" 하면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6학년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며 2012년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기간제 음악 교사로 6학년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학생들은 무례했고 떠들었다. 화가 난 내가 문을 열고 교실을 나가자마자 등 뒤에서는 학생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기간제 했던 학교 학생들에게 나는 비아냥과 조롱으로서의 환호성을 들었지만 태국 학교에서는 나에게 존중과 사랑으로서의 환호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의 10년 넘은 교사 생활 중 태국에서 보냈던 몇 개월은 교사로서의 나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세워주었으며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태국에서 착한 학생들을 만났던 것이 한국에서의 모든 나쁜 기억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몇 개월은 나의 교사 생활 중에서 최고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과 헤어지기 한 두달 전부터, 나는 착하고 예쁜 태국 학생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슬퍼서 집에서 혼자 운적도 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가기 직전, 6학년 학생들, 그리고 나를 특히나 따랐던 총명하고 예쁜 6학년 여학생들은 더욱 슬프게 울었다. 나는 이미 울만큼 울어서 헤어지는 날에는 울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세상에는 살아있지만 다시는 못 만나거나 만나기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태국의 학생들이 그럴 것이다. 6년 전에 6학년이었던 학생들은 이제 거의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온 선생님은 아직도 너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태국에 안 좋은 뉴스가 나오면 내가 가르쳤던 총명하고 착했던 6학년 학생들이 특히나 걱정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걱정되는 마음이 컸다.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태국의 우기



태국과 불교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새 학기 시작 날에 학생들은 근처 사원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교내 아침 조회 시간에조차 선생님은 '카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학생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래서, 나도 불교의 관점을 사용하고자 한다. 만약 다음 생애가 있다면 태국에서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한번 만나볼 수 있기를.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었던 그 학생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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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고 요즘 30대, 40대는 젊다는 말이 있지만 20대와는 다르다.
 
나는 10년전에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다.
내가 순식간에 나이를 먹게 해주세요, 눈 뜨면 40세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빈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를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 사회 분위기를 학습한건지, 아니면 인간의 내재된 본성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도 20대 여성이 만만한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경력을 쌓는 것은 그만두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간단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느덧 경력을 쌓은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40세를 몇년 앞두고 있다.
나의 예전의 소원과 대비하여 지금의 심정을 묻는다면, 내가 예전의 소원과는 다르게 나이 먹는 것에 대해 불만족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예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 상황에 꽤 만족한다.
내가 이제는 젊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젊은 여자 교사에게는, 젊은 남자 교사에게도 그렇지만 첫 시작과 초임 발령받는 학교가 무척 중요하다.
좋은 교장, 교감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좋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교직을 순탄하게 시작하며, 나이를 먹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한테는 이러한 요소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가끔 내가 가는 교사 커뮤니티에 가면 이런 글들이 있었다. '초임 교사때는 애들이 말을 잘 듣는 것이 다 내가 잘하는줄 알았고 반이 어수선한 교실을 보면 그 선생님이 역량이 없어서 그런줄로만 탓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올해 힘든 반을 맡고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달았다.'
 
초임 교사때의 운이 좋음을 깨달았다는 글들은 교사 커뮤니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이런 글들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나는 애초에 이럴 수 없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직에서도 처음 순한 반을 맡아서 학급이 잘 굴러가는 신규 선생님들을 나는 부러워했다. (물론 정말 역량과 실력을 갖춘 경력교사와도 같은 신규교사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거나 어른에게 예의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서 교감은 "신규답지 않게 생글생글 웃지 않는다."며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나는 젊은 여자라는 범주에 들었고 학생들은 그걸 인식했으며 웃기는(어이없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학교에 화장을 하고 가자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들은 "담임선생님이 남학생들을 꼬시려고 화장하고 다닌다." 라고 뒷담화를 했으며(나한테까지 들리니 뒷담화는 아닌걸로..) 한 5학년 남학생은 "우리반 선생님이 ○○(반 남학생 중의 하나)를 좋아한다."라고 중얼거렸다. 
 
교직에 들어선지 10년 이상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20대 젊은 여자 선생님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갈수록 분명하게 느껴진다. 학생들이 나를 젊은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는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학생들이 기어오르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이제 더이상 누나뻘이나 젊은 이모 뻘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과 같은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가 든 선생님이 힘듦을 덜 겪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작년에, 서울 ○○초등학교의 한 선생님은 아이를 두 명둔 경력이 많은 베테랑 선생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힘든 상황은 나이가 든 선생님한테도 일어난다. 나도 물론, 나이를 먹은 시점에서도 정말 힘든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그 학생들도 내가 젊은 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발령받기까지 우리 학교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를 맡은 25세의 젊은 여자 선생님을 반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코로나 시기라서 나와 그 선생님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우리 담임선생님보다 젊다." 
나는 그 때 확실히 알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은 여자 교사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나를 전혀 기분나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학급이 힘든 상황에 와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상황은 내가 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사가 젊기 때문에 학생들이 우습게 보고 교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과,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실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은 미묘하지만 정말 큰 차이였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젊은 선생님에 대한 편견이 있다. 똑같이 학급이 힘든 경우라도 신규 선생님은 "그 선생님이 교사 경력이 없어서 애들을 휘어잡지 못해서 그래." 라고 하지만, 경력과 나이가 있는 선생님의 반은 "그 선생님이 맡았는데도 오죽했으면.."하고 잣대를 다르게 한다. 때로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다른 선생님을 서로 평가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도 30대 중반까지는 이런 평가의 말을 다른 선생님께 직접 들은 적이 있었으나('내가 나이 먹은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내가 젊은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이러한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마지막 학교에서 얼마 전에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선생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했으며 "선생님, 카리스마 있어요." "선생님 영어발음이 좋아요. 멋있어요." 라는 말도 했다. 나는 교사 경력 10년이 넘는 동안 학생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은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은 나에게 기어오를 때가 많았고 나는 카리스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나는 이번에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학생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웃으면서 수업을 했는데 말이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과 지금 가르쳤던 학생들을 같은 태도로 대했기에 학생들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그대로였다. 내가 교사 경력이 쌓여서 어떤 자세가 배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 또한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교사를 그만두고 난 후 잠시 학원에서 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운 기술을 가지고 현장에서 부딪힌다면 어떨까 생각하며 일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내가 이 나이에 기술직으로 일한다는 것이 차라리 낫고 안심이 되었다. 내가 10년만 더 젊은 여자였다면 남자들이 가득한 일터에서 더욱 성적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젊은 나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그것이 나를 조금은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아쉽다는 양가적인 감정도 있다. 10년전, 15년전 사진을 들여다보면 대학생도 아니라,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착각할 정도의 모습을 가진 내가 있었다. 그래도 이 때는 어리고 지금보다는 좀 귀여웠는데 라는 마음도 든다. 워낙 예전 사진을 많이 보다보니 내가 집착하는 것만 같고 그래서 이제는 핸드폰에서 내 예전 사진을 다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만약 내가 기술직이 아니라 사무직을 들어간다면 지금의 나이로서는 도저히 신입으로 취업이 불가능하다. 젊은 여성에서 벗어난 것은 좋지만 취직 시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그리고 가끔씩 길을 가다가 누군가 아직까지는 나를 '아줌마'가 아닌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것에 대하여 안도감도 든다.
 
이러한 모순적인 나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고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올해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30년이 지난 해가 된다. 그 동안의 일들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젊은 여성이 아닌 어른, 나이든 성인 여성이 된다는 것을 자축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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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올라가는 좋아요 하트 수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어떤 분들이 좋아요를 누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자신이 젊기 때문에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핑곗거리가 아니다.

분명히 나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무척 크다.

나는 내가 젊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겪는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참고 또 참았을 뿐이다.

 

만약 내가 10년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른 지역으로 임용고사를 보았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 매몰되어 큰 그림에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내가 있었던 교육청은 다른 교육청으로 전보를 성공하는 것이 무척 어려워서 10년차, 20년차 교사들도 

모두다 실패한 적이 있었던 적이 한 동안은 있었다. 

그래서 아주 다른 환경에서 시작했다면 모든 면에서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만약 타 지역으로 임용고사가 여의치 않더라면 그냥 교사직을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야 힘들게 임용고사를 합격해도 그만 두는 교사들이 많지만 10년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지금 나는 40대가 되어가는데 다시 새출발을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둔 것은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일찍 그만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만약 글을 읽는 누군가가 관리자,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 등 때문에 고통을 받고

그 상황이 꽤나 장기적으로 이어질 기미가 보인다면 우직하게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꿋꿋이 견디지만은 않기를..

이것은 새 출발을 하는 나 자신에게 특히나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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