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3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어렸을 때는, 남들의 말을 잘 듣고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터무니없더라도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 임용고사를 볼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도 않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에
고향에 내려와서 부모님과 심각한 소모적인 충돌이 일어날 때도,
그다음 해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와 대학을 다녔던 지역의 기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모욕과 쌍욕을 받았을 때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나 자신의 열망은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내가 우습게 여기고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인생에서의 그 출발 자체가 나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강요에 의한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가족의 강요로 인해서 교대가 아닌 다른 대학교를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싫었을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교사의 교권이 지금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 최고의 황금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그만두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내 인생의 중요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마음속 한구석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하기도 싫은 임용고사를 보고 교사가 되었는가 떠올려본다면 그 당시의 나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만약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익명의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교사 그깟것 몇 대 몇 안 하는 것을 통과 못하면 니가 뭘 할 수 있겠냐?'
'교대 나온 사람들은 별 능력도 없던데 초등학교 교사라도 되어야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초등교사가 싫어서 안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그깟 것 몇 대 몇 안 하는 초등 임용고사를 통과 못해서 초등교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싫어서 꾸역꾸역 시험을 보았다. 결국에는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10 몇 년 전, 초임 교사 생활을 하면서, 수백 수천 개의 교권침해 사례가 올라오는 초등교사 커뮤니티인 인디XX에도 쓸 엄두조차도 나지 않는 일들을 겪었고 몇 년째 병원도 다녔고 지금도 정신적인 붕괴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그만두기 1년 전까지도 계속하여 힘든 학급을 맡았다.
그러면 왜 초임때 교사를 그만두지 않았는가. 나는 또 이러한 생각을 했다.
'내가 교직에서 최고로 행복할 때 교사를 그만두어야겠다. 그래야 내가 교사를 그만두게 된 이유가 교사가 힘들어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원래 이유처럼 내 의지로 시작해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남들의 시선과 나만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이유를 만들었고 증명을 하려고 하였다.
게다가, 그 와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어서 교사를 그만두기 어려운 상황도 생기게 되었다.
계속하여 교직 생활을 하던 중, 2020년 코로나 발생 시기때 긴급돌봄 업무를 맡게 되었다.
원래 학교에서 돌봄 업무도 힘든 일이지만 갑자기 코로나로 인해 업무 분장에도 없는 '긴급' 돌봄 업무까지 추가로 맡게 되었고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업무는 거의 사라진 반면에 돌봄 업무는 배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생겼다. 학교 전반의 업무를 담당하며 학교에서 업무가 제일 많은 교무부장조차도 나를 보며 '선생님이 학교에서 제일 바쁜 것 알고 있다. 힘내라.'라면서 나를 위로할 정도였다.
매일 학급을 위한 온라인 줌 수업을 준비함과 동시에 긴급돌봄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파악하여 교육청에 보고하고, 도시락 업체와 계약하여 매일매일 점심도 준비하고, 방과후 돌봄 강사 면접 및 계약, 출결관리 등 일만 하다가 앓아누운 적도 많았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학교 교무실무사와 연락하며 긴급돌봄 아이들 명단을 정리하고 있을 때 뉴스를 하나 보게 되었다.
서울시교육감이 "학교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월급만 받고 일을 안 하는 집단도 있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돈만 받고 일을 안 하는 집단은 맥락상 분명히 '교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화가 난 교사들은 서울시교육감에게 항의를 했으며 서울시교육감은 짤막한 사과문을 기재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서울시교육감 눈에는 매일 수업을 하며 집에서도 밤 늦게까지 긴급돌봄 업무를 하는 나 같은 교사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긴급돌봄 업무를 맡는 전국의 수천 명의 초등교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건지 너무 화가 났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교육감은 정말 싫다.
비단 코로나 기간 뿐만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그저 월급쟁이이며 월급충, 방학만 있어서 꿀 빠는 직업. 아이들을 생각하기보다는 돈만 생각하는 직업. 교사만 해서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고 생각도 초딩 수준인 직업일 뿐이었다.
글쎄.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가 맡았던 모든 학급에 교사를 해보라고 시키면 일주일도 안되서 다들 줄행랑을 칠 텐데.
한 번은 내가 자주 가는 동네 맘카페에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교사들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아라, 그래도 요즘 선생님들은 다들 최선을 다한다, 나는 학생에게 심각한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참고 교사직을 한다 등의 짤막한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열개 정도 댓글이 달렸다. 댓글 하나 정도만 요즘 선생님들 고생한다는 것 안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그래요? 그래서요? 이런 댓글이었다. 어떤 댓글은 요즘 선생님들이 스승이냐, 공무원일 뿐이지.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요? 나는 학창 시절에 선생님한테 폭행당한 적도 있는데 요즘 선생님들이 겪는 것은 업보일 뿐이다.라는 글이었다.
내가 임용고사 준비생이었을 때, 나는 내가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나를 증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 이상 너의 능력이 없어서 초등교사가 되네 못되네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고 떳떳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교사가 되니 나는 또 다른 비난에 직면하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월급충, 꿀 빠는 직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나를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무척 허무해졌다. 도대체 그 익명의 사람들의 정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그 사람들에게 나를 증명한다고 한들 나를 귀하게 여겨줄 것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일말의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증명을 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자의로 그만두었고 원점보다도 더 안 좋은 상황에 돌아왔다.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진로나 계획을 설정할 때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거나 증명하려는 노력은 아주 조금도 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사회의 관습, 혹은 나 스스로의 존재 가치의 증명이나 압박감에 내 인생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도 증명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나이와 관련하여 내 귀를 거스르게 하는 것이 있다. 여자 나이 40대면 아줌마이고 이모이고 늙었고 직업의 기회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줌마, 이모라고 부르고 나의 직업에 대해 왈가왈부한들 그것은 그들의 몫이고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사회의 시선에 맞추어 단장을 하고 외모를 꾸미고 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설사 그 목표를 이룬다 한들, 여전히 날 선 말들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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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어디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콕 박혀 있었다.
점심에는 라면을 먹었다.
창문 너머로 봄이 느껴진다.
간장을 샀다. 아무래도 간장이 없으니 허전한 맛이 있다.
냉동실에 남아 있는 해물 전을 다 먹어치웠다.
아니 근데 뒷면에 캘리포니아에서 납을 포함한 화학물질에 노출될 수 있다는 문구는 무엇인가?! 다 먹고 나서야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수출하는 김에도 이러한 문구가 있다고 하니.. 왠지 찝찝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알아보고 있는 요즘이다.
2004년의 어느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갔다.
서울에서 우리 가족은 우리 어머니의 친구들을 만났다.
미국에서 온 우리 어머니의 친구 가족, 그리고 서울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친구 가족과 우리 가족은 한강에서 만났다.
LA에서 온 우리 어머니 친구(어머니는 그분을 LA엄마라고 친근하게 부르라고 했다.)에게는 어린 아들과 딸이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살다 온 교포라서 그런지 한국의 어린이들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제일 기억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부자 친구와 그 분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부자 친구분은 매우 늘씬하고 아름다웠고 그분은 딸을 데리고 왔다. 아들은 미국 유학 중이라고 하였다.
그 딸은 나보다 몇 살 어린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며 뼈대도 가늘고 날씬하였다. 편한 나시 옷을 입고 핸드폰을 목걸이에 차고 있는 그 아이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밝고 명랑함은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꾸밀 줄도 모르고 대충 어머니가 준 하늘색 폴로 셔츠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나는 난생처음으로 무언가와 대면했다는 느낌과 낯설다는 감정, 비교 의식을 느꼈다. 엄마의 LA 친구분의 자식들에게 쭈뼛쭈뼛한 나와는 달리 그 여자아이는 밝게 그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며 친근하게 대화도 나누었다.
그때 보았던 영화도 기억이 난다. 권상우와 하지원이 나왔던 [신부수업]이라는 영화였다. 좌석이 없어서 그런지 거의 맨 앞 좌석에서 눕다시피 하면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여자아이가 명랑하게 웃으며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밤에는 모두 다 한강유람선을 탔다. 캄캄한 밤에 한강변에 밝게 빛나는 집들은 여행의 이정표가 되는 것 같았다. 그 때 어머니의 친구는 한강변의 집을 가리키며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했다. 월드메X디앙이라는 아파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강변의 아파트는 꽤 비싸고 고급 아파트였다. 내부 인테리어를 하는데 2억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2억이면 무척 큰돈이지만 20년 전에는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한강 유람선을 타고 어머니의 LA친구분의 차를 타고 그분이 한국에 보유하고 있는 아파트로 갔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하룻밤 자고 떠나기로 했다. 가는 길 중간에 어머니의 부자 친구분이 살고 계신 월드 메X디앙에 그 친구분과 딸을 중간에 내려주고 갔다. 그 딸은 명랑하게 인사를 하며 할머니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갔다.
2004년의 서울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무거움과 불편함이 생겼다.
명랑하고 아름다운 어머니 부자 친구 모녀도 떠올랐을뿐더러, 그것에 대비해 우리 어머니의 처지와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나를 낳고 수학 과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IMF 무렵에는 학원도 경영하였다. 교사였던 아버지와 과외를 하는 어머니 덕에 생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그것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1000원짜리 물건 하나 사는데도 손이 떨릴 때가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이과 500명 중에서 1등을 한 적도 있다고 하였고, 결국에는 지방 국립대를 가기는 했으나 교직 이수를 통하여 수학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농담을 하면서 자신의 친구 중에 공부를 정말 못했던 동창도 부자를 만나서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 또한 나에게는 무언의 의무감으로 느껴졌다.
어머니는 단순히 수학 과외만 한 것이 아니라 가정일도 병행하였다. 수학 과외는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직장과 가정 일은 분리될 수 없었다.
2004년 서울로의 가족 여행 후에, 나의 사고의 방향은 이런 어머니의 처지를 지나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정말 잘했지만 현재는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가 가엾다, 내가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에 나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있어도 참는 방향으로 지냈고, 더욱 순종적이게 되었다. 대학 입시에서는 아주 조금의 의사 표시는 해보았지만, 결국에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20년이 지났고 2024년이 되었다. 어렸을 적 지방에서 살았고 서울은 아주 가끔 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서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고 가끔씩 드라이브를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의 취미는 한강에서 공용 자전거인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릴 때마다 나는 '서울만 한 도시는 세계에도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울을 사랑한다.
내비게이션을 타고 한강 공원을 찍고 운전을 하는 중,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 골목을 헤치며 운전하는 중, 나는 20년 전에 보았던 그 월드메X디앙 아파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강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나는 차 안이 떠내려갈 정도로 한참 동안을 펑펑 울었다. 2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20년 전에 했던 나의 마음가짐이 나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했던 다짐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에 떠올려보면, 그것은 정말로 필요가 없었던 다짐이었고, 내가 이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의무였을 뿐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와 결혼한 것도, 나를 낳은 것도 어머니의 선택이었다.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가정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 남을 배려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커 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의 선택을 불행하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바라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나의 희생적인 선택이, 결론적으로는 나를 불행하게 하였기 때문에 주변인들도 곤란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였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싶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2004년 여름이다. 그때의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제발. 20년 후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다가와주기를 바란다. 지금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의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해주었으면 한다. 21년 전, 15년 전의 잘못된 생각들이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된 것처럼 지금의 나도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은 미래의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현명한 나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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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기간제 했던 학교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교실을 나오기 직전에 사진을 찍어보았다.
선생님들도 다 퇴근하고 아이들도 없는 시간의 학교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나의 정체성 중의 상당 부분이 교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지 말이다.
나의 지금부터 40대까지 약 10 몇 년간의 시간을 더 거친다면 그때는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교에서 저녁 시간까지 축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과학 선생님과 작별을 하며 학교를 나왔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묘하다. 모든 것을 포근히 감싸 앉는 시간이다.
밤이 있으면 다시 낮이 있듯이 고요했던 학교도 다음 날 아침이면 학생들의 발걸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때가 10월 말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날씨가 딱 선선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이 순간의 기억이 참 포근하다.
내가 있었던 마지막 학교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계약이 끝난 다음날 다시 학교에 와서 사진을 찍었다.
땅은 단단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계속하여 단단할 것만 같은 이 땅도 시간이 지나면 녹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고 나서 3개월이 지났다.
지금 내가 있는 지역은 겨울에는 -20, -30도 되는 지역이지만 4월이 된 오늘 밖을 나가니 덥기까지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학교 운동장도 녹지 않았을까 싶다.
자연에서 두렵지만 가장 경이로운 점은,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내가 망하든
꽃은 피어나고 낙엽은 지고 자연은 순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게 나의 마음을 어쩌면 편안하게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갈 것이라고 몇 달 전에 생각했다.
그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길이 속에서 잠시 멈추어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작년 한 해와 작년의 그 차가운 겨울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024년의 나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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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다. 그래서 왠지 여유로운 느낌이 든다.
저녁 식사로는 떡볶이와 과일을 먹었다.
BC주에 살 때와는 달리 나만의 여유로운 냉장고 공간도 있다! 냉장고 공간이 없어서 그동안은 물건을 쟁여놓기 힘들었는데 참 잘 되었다.
이제 이사가기 힘들고 짐 챙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계속 쭉 살았음 좋겠다는 마음도 들기는 한다.
새로운 집 계약서 지원서를 뽑기 위해 버너비 도서관에 왔다.
날씨가 맑은 오늘, 캐필라노 현수교에 갔다. 밴쿠버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다. 가보고 싶은 곳에 갔다.
캐나다 플레이스에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고 해서 워터프론트 역으로 나갔다.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
캐필라노 현수교로 가는 무료 셔틀을 탔다.
캐필라노 현수교는 도심과 가까운 관광지이다.
각종 토템이 입구에 있다.
주말이고 날이 좋지만 사람들이 크게 북적이지는 않는다.
현수교는 고소공포증이 걸릴 정도로는 무섭지 않았으나 꽤 많이 양 옆으로 흔들린다.
현수교 말고도 절벽 옆을 걸어가는 길이 조성된 Cliff Walk도 있다.
Treetop adventure도 있다.
캐필라노 현수교는 2~3시간이면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시간이 좀 남아 스탠리 공원에 가기로 했다.
스탠리 공원 앞 바이크 렌탈샵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그 유명한 토템 폴도 다시 가 보았다.
BC주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
한달 전에는 얼어붙은 도로가 녹아서 길이 통제되었으나 오늘은 길이 열려서 해변도 가고 공원을 전체적으로 돌 수 있었다.
안녕, 밴쿠버!
오늘은 Parkcrest Diner에서 점심을 먹었다.
베이컨&에그는 맛있다. 아마 이 곳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될듯?
한남 로히드 점으로 가서 필요 없는 물건을 반품했다. 고객 센터에서 손쉽게 반품했다. 산 지 7일 이내의 물건을 반품할 수 있다.
편의점에서 화장지를 샀다. 다행히 소량으로 팔았다. 며칠 후 이사를 가는 데 많은 양의 짐을 가져가기는 힘들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이사갈 지역의 집을 알아보고 화상 통화로 인터뷰도 하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parkcrest diner에 갔다.
클램차우더를 시켰더니 생각했던 흰색 수프가 아니라 토마토 스프가 나왔다. 먹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마녀스프 맛이 났다. 맛은 꽤 그럴듯 했다.
스프링 롤도 하나 먹었다. 소스가 안 나와서 쥐어 짰더니 그릇이 엉망이 되었다. ㅋㅋ
이제 이곳에 머무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비가 온다더니 하늘이 파랗다.
TD 은행의 조건을 다 채우고 드디어 나도 남들처럼 프로모션 조건이 충족되어 400달러를 받았다. 40만원이라는 돈이 큰 돈인데 조건을 충족하여 받게 되다니 큰 기쁨이다. 이것 또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후 거의 2주가 지나서 돈이 들어왔다. 그 동안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고 TD 뱅크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볼까 생각했는데 잘 풀렸다.
이렇듯 기다렸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잘 되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K chicken에서 세트 메뉴를 먹어보았다. 치킨 뿐만 아니라 감자튀김도 정말 맛있고 바삭했다.
어제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캐나다에서 40일동안 있었지만 계속 비가 내리고 어디를 놀러다니고 싶지도 않아서 주로 한 일은 집에만 머무르는 것이었다. 거의 연속으로 열흘 넘게 비가 내리고 날이 흐렸지만 어제는 날이 예외적으로 좋았고 그래서 시애틀로 하루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하였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시애틀까지는 차로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 정도로 가까워서 육로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코스이다. 북미 대륙으로 따지자면 200km 남짓이라서 가까운 거리이고 비슷한 듯 살짝 다른 문화를 가졌다.
나는 어제 미국으로의 하루 당일치기 여행 중 깨달은 점이 많았고 그것이 어쩌면 나의 현재로서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이다.
캐나다에서도 가게에서의 "How are you?" 등의 질문을 많이 받은 적이 있었고 "Have a nice one." 등의 인사를 받은 적이 많았다. 그런데 어제 다녀왔던 미국에서는 더욱 많은 스몰 토크를 겪은 것 같다.
스타벅스 1호점에서 텀블러를 사려고 줄을 사는 도중에 한 여자가 나의 모자를 보고 모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에 있는 빈티지 샵에서 샀다고 말을 할 수도 있었으나 왠지 말을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냥 감사하다고 하였다. 또 시애틀의 전망을 볼 수 있는 케리 공원에서 한 아저씨가 나를 보고 당신은 멋진 모자를 가지고 있고 멋진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해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후에 그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전망을 찍으면서 나에게 뭐라고 하긴 했는데 뭔가 잘 이해도 안 되고 그래서 적당히 웃으면서 다른 장소로 갔다.
정말 북미 사람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스몰 토크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번째 스몰토크는 내가 스타벅스 리저브에서 커피를 마신 후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는 중 버스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보고 어떤 젊은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전문 사진작가인지, 아니면 관광객으로서 찍는 것인지 물어봤다. 나는 관광객이라고 하였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웃으면서 멋지다고 하고 갈 길을 갔다. 그래도 세번째 스몰토크는 내 자신이 마음이 편하고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스몰 토크가 어색하다. 어색하다는 이유는, 나는 스몰 토크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향적이라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즐겁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큰 에너지가 든다. 또한, 일회적이고 단발적인 만남에서 스몰 토크는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아직 감이 잡히지도 않으며 또한 내가 아직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에 스몰 토크를 내가 시도해본 적은 있었다. 작년 미국 LA 여행을 위해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허츠 렌터카로 간 적이 있었다. 중년 여성 직원은 여자 혼자서 미국을 렌터카로 여행하는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미리 준비한 "I'm the best driver in South Korea." 라는 문장을 말했더니 그 분은 웃으면서 좋아했다. 그게 내가 했던 유일한 스몰 토크에 대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사실, 그 때 말한 문장도 말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스몰 토크는 생존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언어라는 것은, 외국어도 마찬가지만 자국어로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때가 있다.
나는 학창시절과 대학교 1학년 정도까지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으로, 남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친해져 본 적이 거의 없는 성격이었다. 내향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내향적인 성격으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내향적인 성격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친구들 말고 남들에게 어떻게 대화를 걸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옆에 앉은 한 남학생은 나에게 벙어리가 아니냐고 말한 적까지 있었다.
대학교는 집에서 몇 시간 떨어진 타지에서 다니게 되었고, 나는 완전히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에게는 커다란 위기감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생존과도 직결되었다. 대학 입시 만큼의 큰 어려움에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어색하더라도 남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을 했다. 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문장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심지어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보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겠다는 대본을 많이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속상할 때가 많았다. 남들은 타인과 친근해지기 위한 성격을 타고났는데 나는 이렇게 커다란 노력을 해야만 겨우 남들과 비슷하게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게 유전이든, 환경적 요인이든 내가 극복해야만 했던 것들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남들과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는 더욱 친해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2학년 때에는 대학 동아리까지 들면서 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해외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스몰 토크를 해야 하는 상황은 대학교 1학년 때, 마주해야만 했던 갑작스럽고도 부담스러운 현실과 거의 비슷하다. 많이 연구하고, 부딪치면서 스몰 토크의 범위와 나만의 방식, 나의 영역을 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국어든, 외국어든 새로운 환경에서 남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안정적인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새롭고 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 필요한 성장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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