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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카테고리 없음 / 2025. 2. 11. 16:16

대한항공 저녁 비행기로 출발한 밴쿠버행 비행기. 탑승장에 제 때 안온 사람들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다. 결국에 그 사람들은 못 타고 비행기는 출발함.

인천 공항에서 밴쿠버 공항까지 약 9시간의 여정.

첫번째 식사는 소고기 요리를 선택했다. 그럭저럭 먹을만함.

비행기를 타면서 처음으로 기내 와이파이를 사용해보았다. 이것저것 검색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금 느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게 잘 사용했다.

두 번째 식사는 스크램블 에그와 죽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죽을 먹었다. 죽은 양이 적었다.

긴 비행 끝에 밴쿠버에 도착했다. 잠을 좀 자고 싶었는데 거의 못 잤다.

입국 수속 후 수화물 찾는 곳 옆에 이민국에 들어가서 워킹 비자 2년짜리를 받았다. 사람들이 많아서 꽤나 기다려야 했다. 11시 10분에 밴쿠버에 도착했는데 입국 수속, 이민국에서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공항을 나온 시간은 약 2시였다.

Burnaby에 있는 숙소로 가는 중..

한달 숙소를 예약했다. 원래는 밴쿠버에 오래 있으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긋나버리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밴쿠버 한달 살기가 되어버렸다. ㅋㅋㅋ

전망이 끝내주었고 포근하고 예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집 주인이 알려준 한국&일식 음식점인 hon sushi가 근처에 있어서 다녀와보았다. 한국식 고추 후라이드 치킨과 초밥 몇 개를 구입했다.

귀여운 고양이 두마리가 옆에서 얼쩡거린다. ㅋㅋㅋ

방 문을 열어놓으니 고양이는 제 방인마냥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 😅

밴쿠버에서의 첫날이었다. 이것저것 마음이 심란했으나 일단 비자를 받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하여 마음이 놓였다.

Posted by 세루리안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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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파이어

생각 / 2025. 2. 6. 23:44

나는 신파를 정말 싫어한다.
그 감정의 과잉, 억지 눈물 등은 사람을 정말 질리게 한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학교의 행사 중 대표적인 신파는 수련회 중 캠프파이어며
인터넷에서 주기적으로 끌어올려져서 학교를 조리돌림하는데 사용되는 소재이다.
 
물론, 군대식 교관과 억지 슬픔을 짜내는 수련회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7,8년 전에 학생들을 이끌고 수학여행을 갔을 때 만났던 교관들은 과거 20년전의 교관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교관들 스스로도 우리는 그러한 군대식 교관이 아니며
학생들을 안전하게 지도하고 즐겁게 수학여행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학생들에게 화내거나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는다.
학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학생들을 들었다 놨다 휘어잡는 노련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전문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안전을 위해 수학여행에서는 캠프파이어를 하지도 않는다. 
 
나도 20 몇 년 전, 6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밤이 되자 수학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캠프파이어 의식이 시작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노래를 부르고 손에 손잡고 원을 그리며 돌며 의식은 고조되었고
점점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며 교관은 점점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부터 시작해서 온갖 미사여구와 교훈이 짬뽕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라는 말까지 꺼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훌쩍이기 시작했다. 교관의 말은 분명히 터무니없고 괜히 억지 눈물을 짜내고
감정의 과잉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이었다. 
 
훌쩍이던 아이들은 이제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과 함께 펑펑 울었다.
 
정말 슬퍼서가 아니라 나도 울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 해에, 나는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 때 갔던 수련회에서는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6학년이 되어서 나를 괴롭혔던 애와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6학년이 되어서도 완전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은 없었지만 반에서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생겼다.
 
나도 드디어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5학년 때 캠프파이어에서는 결코 울 수 없었고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6학년 때의 캠프파이어는 기나긴 왕따의 끝이었으며 나는 아이들과 함께 펑펑 울음으로써 내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카타르시스적인 감정이었던 것이었다. 나도 반 아이들처럼 평범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열망이 실현되었던 순간인 것이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 그 전날 편지를 썼는지 5학년 때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작년에는 미안했다며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코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수학여행 때 감정이 고조되어서 쓴 글이겠지.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닌가? 어설픈 글 몇 마디로 나의 평생의 고통이 쉽게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그 편지를 구겨서 버렸다.
 
가끔은 그것이 눈에 훤히 보이고 바보같을지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할 때가 인생에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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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태국 방콕 근교의 한 초등학교에 파견 근무를 간 적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외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나였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나와 해외와는 큰 연관이 없을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운이 좋게 코로나 직전에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몇달간 태국에 다녀왔다. (코로나가 유행하고 몇년 동안은 프로그램이 중단되었고 그 직전에 참 운이 좋게 다녀온 것이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태국에 가서 태국 문화와 언어 등의 교육을 받고 2달 반 동안 방콕 근교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 학교 당 2명씩 파견이 되었고 나는 나의 짝 선생님과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로 파견이 되었다. (짝 선생님은 중등이라서 중학생을 가르쳤고 나는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사뭇쁘라깐의 한 공립 초등학교



학교는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나는 특히 분홍색 벽과 작은 간판이 좋았다. 나는 태국의 학교들은 내가 갔던 곳처럼 다 예쁘게 꾸며져 있을줄 알았지만 다른 태국의 학교를 살펴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학교 도서관 건물


그 학교의 초등학생들은 외국인 선생님을 처음 보았다고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나와 짝 선생님을 신기해했다.

많은 학생들이 그랬지만 특히 6학년 학생들은 나와 짝 선생님이 근무하던 교무실로 많이 찾아왔다.

그 학생들은 태국어를 할줄 알고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내 앞에서 번역기에 태국어로 글을 쓴 다음 영어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대다수는 이런 내용이었다.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저는 선생님이 이 학교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감동을 받았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전교의 학생들이 외국인 선생님 수업을 경험하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나는 2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양한 학생들에게 수학, 과학, 영어를 가르치도록 시간표가 짜여졌다.

학생들에게 예상치 못한 사랑을 받았고 그건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누가 나한테 이 삶이 여기까지라고 해도 오히려 만족했을것 같을 정도였다. 아이들과의 아름답고 예쁜 추억을 안고 삶에서 더 나쁜 기억 없이 마무리한다는것이 참 좋을테니 말이다.

태국의 학교는 특이한 행사가 참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광고 회사들이 학교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수업 시간은 하지 않고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광고 회사의 광고를 듣고 물건을 받는다. 태국의 유명한 두유 회사도 프로모션 겸 학교에 방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내가 예정된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수업을 안 해서 좋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래도 괜찮나 싶었다.

특히 나를 제일 좋아하는 6학년 학생들 수업 시간과 그런 행사들이 많이 겹쳐서 한동안 6학년 학생들을 보지 못했다.

6학년 수업이 들었던 어느날,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이러한 말을 했다. 학교 선생님들끼리 근처 사원에 가는데 선생님도 따라가는게 어떻겠냐 라고 말이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와 짝 선생님께 평소에도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고 태국 음식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의 이러한 제안이 그러한 마음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교장선생님, 저는 6학년 수업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 가지 않고 6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흔쾌히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전망이 좋았고, 시원한 맞바람이 잘 들어왔던 4층의 6학년 교실


내가 수업을 할 지 안 할지 궁금해했던 6학년 학생들은 내가 남아서 수업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예~!" 하면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6학년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며 2012년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기간제 음악 교사로 6학년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학생들은 무례했고 떠들었다. 화가 난 내가 문을 열고 교실을 나가자마자 등 뒤에서는 학생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기간제 했던 학교 학생들에게 나는 비아냥과 조롱으로서의 환호성을 들었지만 태국 학교에서는 나에게 존중과 사랑으로서의 환호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의 10년 넘은 교사 생활 중 태국에서 보냈던 몇 개월은 교사로서의 나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세워주었으며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태국에서 착한 학생들을 만났던 것이 한국에서의 모든 나쁜 기억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몇 개월은 나의 교사 생활 중에서 최고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과 헤어지기 한 두달 전부터, 나는 착하고 예쁜 태국 학생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슬퍼서 집에서 혼자 운적도 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가기 직전, 6학년 학생들, 그리고 나를 특히나 따랐던 총명하고 예쁜 6학년 여학생들은 더욱 슬프게 울었다. 나는 이미 울만큼 울어서 헤어지는 날에는 울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세상에는 살아있지만 다시는 못 만나거나 만나기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태국의 학생들이 그럴 것이다. 6년 전에 6학년이었던 학생들은 이제 거의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온 선생님은 아직도 너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태국에 안 좋은 뉴스가 나오면 내가 가르쳤던 총명하고 착했던 6학년 학생들이 특히나 걱정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걱정되는 마음이 컸다.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태국의 우기



태국과 불교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새 학기 시작 날에 학생들은 근처 사원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교내 아침 조회 시간에조차 선생님은 '카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학생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래서, 나도 불교의 관점을 사용하고자 한다. 만약 다음 생애가 있다면 태국에서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한번 만나볼 수 있기를.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었던 그 학생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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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0) 202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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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고 요즘 30대, 40대는 젊다는 말이 있지만 20대와는 다르다.
 
나는 10년전에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다.
내가 순식간에 나이를 먹게 해주세요, 눈 뜨면 40세가 되게 해주세요 라고 빈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를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 사회 분위기를 학습한건지, 아니면 인간의 내재된 본성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도 20대 여성이 만만한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경력을 쌓는 것은 그만두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간단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느덧 경력을 쌓은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40세를 몇년 앞두고 있다.
나의 예전의 소원과 대비하여 지금의 심정을 묻는다면, 내가 예전의 소원과는 다르게 나이 먹는 것에 대해 불만족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예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 상황에 꽤 만족한다.
내가 이제는 젊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젊은 여자 교사에게는, 젊은 남자 교사에게도 그렇지만 첫 시작과 초임 발령받는 학교가 무척 중요하다.
좋은 교장, 교감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좋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교직을 순탄하게 시작하며, 나이를 먹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한테는 이러한 요소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가끔 내가 가는 교사 커뮤니티에 가면 이런 글들이 있었다. '초임 교사때는 애들이 말을 잘 듣는 것이 다 내가 잘하는줄 알았고 반이 어수선한 교실을 보면 그 선생님이 역량이 없어서 그런줄로만 탓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올해 힘든 반을 맡고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달았다.'
 
초임 교사때의 운이 좋음을 깨달았다는 글들은 교사 커뮤니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이런 글들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나는 애초에 이럴 수 없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직에서도 처음 순한 반을 맡아서 학급이 잘 굴러가는 신규 선생님들을 나는 부러워했다. (물론 정말 역량과 실력을 갖춘 경력교사와도 같은 신규교사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생글생글 웃는 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거나 어른에게 예의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서 교감은 "신규답지 않게 생글생글 웃지 않는다."며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나는 젊은 여자라는 범주에 들었고 학생들은 그걸 인식했으며 웃기는(어이없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학교에 화장을 하고 가자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들은 "담임선생님이 남학생들을 꼬시려고 화장하고 다닌다." 라고 뒷담화를 했으며(나한테까지 들리니 뒷담화는 아닌걸로..) 한 5학년 남학생은 "우리반 선생님이 ○○(반 남학생 중의 하나)를 좋아한다."라고 중얼거렸다. 
 
교직에 들어선지 10년 이상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20대 젊은 여자 선생님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갈수록 분명하게 느껴진다. 학생들이 나를 젊은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는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학생들이 기어오르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이제 더이상 누나뻘이나 젊은 이모 뻘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과 같은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가 든 선생님이 힘듦을 덜 겪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작년에, 서울 ○○초등학교의 한 선생님은 아이를 두 명둔 경력이 많은 베테랑 선생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힘든 상황은 나이가 든 선생님한테도 일어난다. 나도 물론, 나이를 먹은 시점에서도 정말 힘든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그 학생들도 내가 젊은 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발령받기까지 우리 학교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를 맡은 25세의 젊은 여자 선생님을 반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코로나 시기라서 나와 그 선생님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우리 담임선생님보다 젊다." 
나는 그 때 확실히 알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은 여자 교사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나를 전혀 기분나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학급이 힘든 상황에 와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상황은 내가 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사가 젊기 때문에 학생들이 우습게 보고 교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과,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실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은 미묘하지만 정말 큰 차이였다.
 
교사들 사이에서도 젊은 선생님에 대한 편견이 있다. 똑같이 학급이 힘든 경우라도 신규 선생님은 "그 선생님이 교사 경력이 없어서 애들을 휘어잡지 못해서 그래." 라고 하지만, 경력과 나이가 있는 선생님의 반은 "그 선생님이 맡았는데도 오죽했으면.."하고 잣대를 다르게 한다. 때로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다른 선생님을 서로 평가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도 30대 중반까지는 이런 평가의 말을 다른 선생님께 직접 들은 적이 있었으나('내가 나이 먹은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내가 젊은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이러한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마지막 학교에서 얼마 전에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선생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했으며 "선생님, 카리스마 있어요." "선생님 영어발음이 좋아요. 멋있어요." 라는 말도 했다. 나는 교사 경력 10년이 넘는 동안 학생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은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은 나에게 기어오를 때가 많았고 나는 카리스마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나는 이번에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학생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웃으면서 수업을 했는데 말이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과 지금 가르쳤던 학생들을 같은 태도로 대했기에 학생들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그대로였다. 내가 교사 경력이 쌓여서 어떤 자세가 배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 또한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교사를 그만두고 난 후 잠시 학원에서 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운 기술을 가지고 현장에서 부딪힌다면 어떨까 생각하며 일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내가 이 나이에 기술직으로 일한다는 것이 차라리 낫고 안심이 되었다. 내가 10년만 더 젊은 여자였다면 남자들이 가득한 일터에서 더욱 성적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젊은 나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그것이 나를 조금은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아쉽다는 양가적인 감정도 있다. 10년전, 15년전 사진을 들여다보면 대학생도 아니라,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착각할 정도의 모습을 가진 내가 있었다. 그래도 이 때는 어리고 지금보다는 좀 귀여웠는데 라는 마음도 든다. 워낙 예전 사진을 많이 보다보니 내가 집착하는 것만 같고 그래서 이제는 핸드폰에서 내 예전 사진을 다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만약 내가 기술직이 아니라 사무직을 들어간다면 지금의 나이로서는 도저히 신입으로 취업이 불가능하다. 젊은 여성에서 벗어난 것은 좋지만 취직 시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그리고 가끔씩 길을 가다가 누군가 아직까지는 나를 '아줌마'가 아닌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것에 대하여 안도감도 든다.
 
이러한 모순적인 나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고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올해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30년이 지난 해가 된다. 그 동안의 일들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젊은 여성이 아닌 어른, 나이든 성인 여성이 된다는 것을 자축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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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올라가는 좋아요 하트 수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어떤 분들이 좋아요를 누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자신이 젊기 때문에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핑곗거리가 아니다.

분명히 나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무척 크다.

나는 내가 젊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겪는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참고 또 참았을 뿐이다.

 

만약 내가 10년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른 지역으로 임용고사를 보았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 매몰되어 큰 그림에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내가 있었던 교육청은 다른 교육청으로 전보를 성공하는 것이 무척 어려워서 10년차, 20년차 교사들도 

모두다 실패한 적이 있었던 적이 한 동안은 있었다. 

그래서 아주 다른 환경에서 시작했다면 모든 면에서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만약 타 지역으로 임용고사가 여의치 않더라면 그냥 교사직을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야 힘들게 임용고사를 합격해도 그만 두는 교사들이 많지만 10년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지금 나는 40대가 되어가는데 다시 새출발을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둔 것은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일찍 그만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만약 글을 읽는 누군가가 관리자,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 등 때문에 고통을 받고

그 상황이 꽤나 장기적으로 이어질 기미가 보인다면 우직하게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꿋꿋이 견디지만은 않기를..

이것은 새 출발을 하는 나 자신에게 특히나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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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0일

잡동사니 / 2025. 1. 10. 19:50

내가 정규직을 그만 두고 비정규직 직장 4군데에서 일한지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결실은 맺지 못해도 나는 여러 가지를 배웠고 그것 때문에 1년은 더욱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올해 그만두고 나서 내 인생은 더욱 다이나믹해졌다.

마치 나의 인생이 영화의 한 부분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국에서 파견 교사로 일하고 난 다음 마무리를 할 때 학생들이 웃으며 나에게 작별인사로 손을 흔들어 주었을때 그 모습은 슬로우모션처럼 내 뇌리에 남았다.

그런 일들이 인생에는 몇 번 있었다.

시간은 빨리감기를 한 듯 쏜살같이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내 머릿속에 저장된 슬로우모션같은 장면들을 수십, 수백번 재생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을 빨리 감기를 하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보게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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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7일

잡동사니 / 2025. 1. 7. 14:34

 

2007년 3월 3일 기숙사에서 찍은 사진.

개강 며칠 전, 부모님은 나를 ○○에 있는 기숙사로 데려다주었다.

○○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대학생이 되는 나는 포부라던가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아예 없었다. 예쁘게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도, 이성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다.

여중과 여고를 나온 나한테 있어서 OT에서 본 과의 키 큰 남자들은 정말 낯설기만 한 존재였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나는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고 남한테 정말 무관심하였으며 심지어는 나 자신한테도 무관심할 때가 많았다.

대학생이 되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할까 이런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고등학생 때 맸던 백팩(브랜드도 아니고 그야말로 진짜 고등학생 티가 나는 백팩)을 그대로 메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로 가기 하루 전,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대학생으로서 들고 다닐 가방을 사러 원대 앞 번화가로 갔다.

나는 정말 고심하여 가방을 골랐다. 가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들고 다닐 예쁘고 반짝반짝한 소재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들과 나 자체한테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고등학생과는 구별되면서도 수수한, 나한테 어울리는 가방을 찾느라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도 내가 마음에 드는, 나에게 잘 어울리는 가방을 찾았으며 그것이 위에 나와 있는 2만원짜리 가방이다.

이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설픈 시절이었다.

난 그 후로도 내 디카로 찍은 이 가방을 수십, 수백번 다시 보았고 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가방이 있어야 할 곳은 이 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어야 했는데.."

어설픈 나의 포부가 시작했어야 할 방향은 그 기숙사가 아니라 다른 곳이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원하던 장소여야 했다.
비록 어색한 첫 출발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찍은 이 사진은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 같다.

그래도 과거의 나를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내가 그 때 했던 활동들, 소중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과 감사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다.

이제는 이 가방을 놓아줄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가방을 기억하고 후회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바뀐 이름으로 살고 있으나 내가 예전에 그 이름이었다는건 변함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바뀔 수 없다. 나의 어설픈 시절과 서툰 모습 그 외의 모습까지 모두 다 나이기 때문에.

조금 늦었지만 다른 가방을 메고 나로서 출발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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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유튜브 이병섭 채널

( https://youtu.be/hnCU1thqSpE?si=r0MO9vnnVAxZIWId)

 

키노КИНО (KINO)

- 담배 한 갑

(Пачка сигарет)

 

<1절>


Я сижу и смотрю в чужое небо из чужого окна
나는 여기 앉아 다른 이의 창문을 통해 낯선 하늘을 바라보지만


И не вижу ни одной знакомой звезды
익숙했던 그 별들은 단 한개도 보이지 않네


Я ходил по всем дорогам и туда, и сюда
길을 따라 이곳 저곳 돌아다녀도 보았다만


Обернулся и не смог разглядеть следы
뒤돌아보았을 때 발자국은 남아있지 않았네

 


<후렴>

 

Но если есть в кармане пачка сигарет
하지만 주머니 속에 담배 한 갑이 있다면


Значит, всё не так уж плохо на сегодняшний день
그랬던 오늘 하루도 그렇게 나쁘지많은 않았다는 뜻이겠지


И билет на самолёт с серебристым крылом
또한 은빛 날개를 가진 비행기의 표가 있다면


Что, взлетая, оставляет земле лишь тень
날아올라 대지에 그림자만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되겠지

 

 

<2절>


И никто не хотел быть виноватым без вина
그 누구도 죄 없는 죄인이 되길 원치 않겠지


И никто не хотел руками жар загребать
그 누구도 타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긁어모으고 싶지는 않을 테니


А без музыки на миру смерть не красна
음악이 없다면 슬픔은 배가 될 것이고


А без музыки не хочется пропадать
음악이 없다면 죽기도 싫어지겠지

 

 

<후렴>

 

Но если есть в кармане пачка сигарет
하지만 주머니 속에 담배 한 갑이 있다면


Значит, всё не так уж плохо на сегодняшний день
그랬던 오늘 하루도 그렇게 나쁘지많은 않았다는 뜻이겠지


И билет на самолёт с серебристым крылом
또한 은빛 날개를 가진 비행기의 표가 있다면


Что, взлетая, оставляет земле лишь тень
날아올라 대지에 그림자만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되겠지

 

 

<후렴>

 

Но если есть в кармане пачка сигарет
하지만 주머니 속에 담배 한 갑이 있다면


Значит, всё не так уж плохо на сегодняшний день
그랬던 오늘 하루도 그렇게 나쁘지많은 않았다는 뜻이겠지


И билет на самолёт с серебристым крылом
또한 은빛 날개를 가진 비행기의 표가 있다면


Что, взлетая, оставляет земле лишь тень
날아올라 대지에 그림자만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되겠지

 

 

빅토르 초이(Виктор Цой)를 처음으로 알게 한 노래.

비흡연자이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담배 한갑을 피운 것만 같다.

나의 니코틴 같은 노래!

가보지도 않은 1989년의 차가운 레닌그라드의 겨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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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오스탄키노코리아 채널

(https://youtu.be/PSNxSCTW5b0?si=ToVmy5ea29FZ9oCR)

 

키노-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КИНО - Хочу перемен!)

<1절>

Вместо тепла - зелень стекла
따뜻함이 있어야 할 곳엔 초록색 유리가

Вместо огня - дым
불이 있어야 할 곳에는 연기가

Из сетки календаря выхвачен день
달력의 하루가 찢어졌다

Красное солнце сгорает дотла
붉은 태양은 모두 타버리고

День догорает с ним
하루가 태양과 함께 타버린다

На пылающий город падает тень
불타는 도시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Перемен! -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후렴>

Перемен! -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2절>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성냥갑은 비어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에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이 계획은 간단하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더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것은 우리 안에 있다

<후렴>

Перемен! -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3절>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후렴>

Перемен! -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빅토르 초이(Виктор Цой). 러시아의 음악 영웅

2024년 12월에 들으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가사도 더 와닿고

뭔가 피를 끓게 한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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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동굴에서 나와 다시 그랩을 통해 차를 잡고

20분동안 이동하여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들어갔다.

메르데카 광장에서 내리고 그 옆에 있는 시티 갤러리에 들어갔다.

 

 

 

 

 

시티 갤러리 입구에는 I♥KL이라는 간판이 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난 후 사진을 찍었다. 

 

 

 

 

 

 

1층 벽면에는 쿠알라룸푸르의 역사가 설명되어 있으며

메르데카 광장 앞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의 모형이 있었다. 

 

 

 

 

 

 

 

1층 화장실 쪽으로 나가면 색다른 공간이 나오는데

높은 줄에 각종 문양의 천을 매달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나무도 천 조각으로 장식 되어 있다.

 

 

 

 

 

 

 

2층 상영관에는 쿠알라룸푸르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모형이 있다.

상영 시간은 10분 정도로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며

모형 빌딩과 길에도 불빛이 들어온다.

 

 

 

 

 

 

 

 

시티 갤러리 1층에는 기념품 샵이 있다.

 

 

 

 

 

 

말레이시아 관광지에 대한 사진첩과 종이 접기 등이 있다.

 

 

 

 

 

 

카야잼 토스트가 계산대 옆에 있었다.

맛있어보이지만 사지 않았다.

2년 전에 카야잼 토스트를 사고 난 후 먹지 않아서 곰팡이가 슬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시티 갤러리를 나가면서 뜻밖의 행운을 발견했다.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는 고양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후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메르데카 광장으로 나왔다.

넓게 탁 트인 광장을 감상하며 잠시 거닐었다.

 

 

 

 

 

 

광장 맞은편에 있는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은

2년 전에 왔을 때 공사를 해서 외관이 별로였는데

이제는 완성되어 깔끔한 모습이 되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많이 지났고

공항으로 가야만 했다.

이 곳 메르데카 광장에는 그랩을 잡기가 무척 힘들어서

조금 이동해 다른 곳으로 걷기로 했다.

 

 

 

 

5분 정도를 걸어서 Masjid Jamek Lookout Point에 도착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평화롭고, 여유가 있는 공간이었다.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Grab을 부르고 곧장 떠났다. 

 

 

 

 

가져온 수정구슬을 사용하여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 후로 비행기를 놓친 에피소드

 

호텔에서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려는 데 문제가 생겼다.

말레이시아의 심각한 교통 체증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Masjid Jamek Lookout Point에서 Impiana 호텔까지는 2.4km 정도 되었다.

하지만 퇴근 시간과 겹쳐서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2.4km 거리를 30분 넘게 운전해서야 겨우 도착한 것이다.

진심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6시 30분,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항공편 보딩 타임은 7시 50분이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는 무려 60km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가야만 했다.

 

Grab 운전자는 길이 막힌다고 했고

나는 공항에 7시 50분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도심을 벗어날 때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도심을 빠져나오니 차들이 얼마 없어서 막히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랩 운전자는 이상하리만치 천천히 달렸다.

분명히 공항에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무척 느려서 다른 모든 차들이 다 앞질러 갈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차들을 다 보내고 나서야 겨우 비상 깜박이를 켜고 차선을 변경했다.

하지만 나는 택시 기사를 재촉하지 않았다.

더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기 때문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7시 40분이었다.

수화물을 붙이러 카운터에 갔지만 이미 늦었다. 닫혀 있었다.

 

10분만이라도 일찍 도착했더라면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택시 기사가 남들만큼이라도 운전을 했다면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인천의 택시 기사였고

외국인이 공항에 늦었다고 했다면 안전을 보장하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쿠알라룸푸르의 퇴근 시간 교통 체증에 무지해서

일정을 잘 고려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 크다.

그리고 택시 기사는 천천히 운전을 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보호할 권리도 있다.

 

 

서울의 교통 체증도 쿠알라룸푸르에 댈 것이 못 되었다.

내가 겪었던 교통 정체 중에서 가장 최악이었다.

 

 

 

 

 

 

 

 

KLIA 2 공항에 있는 올드타운 화이트 커피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미 코타키나발루 비행기는 놓쳤고 허기부터 달래기로 했다.

 

 

 

 

 

 

 

2년만에 다시 와 본 올드타운 화이트 커피에서 아쌈 락사와 나시 르막을 시켰다.

다른 곳과 비교해 봤을 때 가격은 조금 더 비쌌다.

맛은 평균 정도였다. 이 곳의 아쌈 락사는 신 맛이 좀 강했다.

 

 

 

 

 

 

 

 

 

달콤한 카야잼 토스트와 커피를 시켰다.

말레이시아 음식, 디저트는 무척 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른 체중을 유지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대단할 지경이다.

 

2년 전에 이 곳에서 카야잼 토스트와 커피를 먹었을 때는

충격적으로 맛있었는데

다시 찾아와서 먹어보니 예전과 똑같은 느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역시 어떤 경험이든 처음에 얻었던 놀라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맛은 있었다.

 

 

올드타운 화이트 커피에서 저녁을 해결한 후

공항 근처의 Tune Hotel로 갔는데

그 곳까지 가는 과정도 정말 힘들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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